수치심
고통스러운 자의식을 다스리는 법
지은이: 조지프 버고 (심리치료자, 정신 분석가)
옮긴이: 박소현
출판사: 현암사
수치심이란
수치심은 다양하게 드러나는 감정이다. 무겁고 단편적인 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서로 연결된 여러 감정의 계보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그저 가벼운 불쾌감 정도일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수치심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하며, 그것은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어떻게 사회화되었고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도록 배웠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반응은 또한 자신의 개인이 느끼는 자존감의 정도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매일 수치심의 계보에 속한 감정들에 대처한다.
‘파티에 오는 다른 손님들은 어느 정도 차려입었을 것이며 나는 무엇을 입고 가야 할까?’, ‘나의 상사는 내 업무 성과를 평가하며 어떤 말을 할까?’, ‘일이 끝나고 00에게 술 한잔하자고 하면 이를 거절할까?’
온갖 형태의 수치심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점령하는 많은 것 뒤에 숨겨진 힘이다 ““
수치심에 대한 선입견
선입견 1
:수치심은 나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이 있다. 우리는 종종 부끄럽다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수치심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남들 앞에서 실수하면 부끄러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쉽게 인정하지만, 내가 그것을 수치심의 일종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다들 실수 ‘정도는 하잖아?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런 건 수치심을 느낄만한 일이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순간, 엄청나게 파괴적이며 해가 되는 경험인 수치심과 다양한 감정의 계보 전체를 다루는 수치심 사이의 차이점을 기억해 보자.. 후자에 속한 감정의 대부분은 가볍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특징을 지니며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을 이루고 있다.
선입견2
:수치심은 적이다
존 브래드쇼가 1988년 그의 획기적인 연구 발표 이후에 사람들은 그가 주장한 '유독성 수치심'의 개념과 수치심을 사실상 같은 의미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개념은 유년기 삶에서 부모와 교사, 혹은 의미 있는 성인이 아동에게 주입한 파괴적인 메시지며, 스스로 느끼기에 자신은 결함이 있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감각을 뜻한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수치심이란 부정적인 경험을 부과한다고 믿게 된다. 수치심의 어떤 형태는 의심할 여지없이 유독하다. 다른 다양한 측면들은 그런 종류의 위험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보자. 수치심의 경험은 때때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도 품고 있다. 만약 그런 점을 묵살하거나 반발하고 저항한다면, 우리는 성장할 기회를 잃게 되고 만다.
선입견 3
:수치심은 자존감의 반대다
우리가 만약 수치심을 ''유독성 수치심'과 같은 개념으로 본다면 그것은 자아 존중감이라는 강력한 감정에 적대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수치심은 반드시 외부에서 기인한 유독한 경험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 일상에 배어든 불가피한 부분으로 그 감정을 이해한다면, 수치심과 자존감은 그토록 명확한 대조를 이루는 정반대의 축은 아니다.
선입견 4
:자존감은 전부 자아에 대한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외부세계의 영향이 없는 자족적인 경험이라는 암시를 준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는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말 같고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자신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련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작은 집단들에 연결되고 종속되어 있다. 그들의 감정과 의견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타인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상태로 오직 홀로 존재하고 이해될 수 없다. 그런 고립된 자아에 대한 관점은 아예 성립할 수 없다.